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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4세기 후반(369년~562년) 고대 일본의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이 백제, 가야, 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년간 지배했었다는 학설이다.

아니, 학설이 아니라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하여 중등학교 뿐만 아니라 각종 역사 교과서에 버젓이 기술하고 있다.


우선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네 가지.


첫째,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꼽을 수 있다. 둘째 일본의 이소노카미[石上] 신궁(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이고, 셋째,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인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이다. 넷째가 중국 역사서인 송서(宋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는 당사자인 일본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인 한국 측에도 있고 제3자인 중국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과 일본 국민들을 철저하게 옭아 맨 침략논리가 있었으니, 그 기초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었다.

이는 당시 군국주의자들과 우익 인사들 사이에서 하나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던 논리이기도 했다. 그 기초 위에서 정한론(征韓論)의 역사적 타당성이 도출되었을 것이며 대륙 침략과 대동아공영권의 기본구상이 나왔을 것이다.

 

 

 

 


*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의 기초이자, 출발점이 된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 제40대 국왕인 천무왕(天武王, 재위 673~686) 때 시작하여 제44대 국왕 원정왕(元正王, 재위 715~724) 때에 완성된 일본의 고대 역사서이다.

백제가 663년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일본내의 친백제계였던 천지왕(天智王)이 죽자, 그의 동생인 대해인 왕자(大海人王子)는 반백제계 세력과 힘을 합쳐 임신변란(壬申變亂)이라 불리는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킨다. 그가 이 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왕(日王)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바로 천무왕(天武王)이다.

그는 과거 소아(蘇我) 가문처럼 일부 힘있는 호족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국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정치적으로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수립하려 했고, 경제적으로는 부민소유제(部民所有制)를 폐지하여 공지공민(公地公民)의 원칙을 최대한 관철시키고자 했다. 또한 진인(眞人), 조신(朝臣) 등 8개의 성(姓)을 정하여 국왕과 호족의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려 했다.

이렇듯 천무왕(天武王)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임신변란(壬申變亂)을 주도해 자신의 힘으로 일본의 왕위를 쟁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강력한 친정체제를 구축한 천무왕(天武王)은 한반도에서 삼국(三國)의 여러 제왕들이 그러했듯이, 역사서를 편찬하기에 이른다.

편찬동기가 그러하니 그 내용은 안 봐도 뻔하지만, 개략적으로 일본 왕실의 권위와 신성한 이미지를 제일의 목표로 기술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몇가지 이상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위에서 보듯이 백제의 멸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잇다는 것이다. 또 친백제계, 반백제계란 말이 나오고 일본 국왕을 좌지우지했다는 최고실력자 소아(蘇我) 가문이란 말도 나온다. 이에는 뭔가 사연이 있을 듯도 하다.

그 내막을 알려면 시대를 한참 거슬러 백제가 가장 강성했던 4세기 중반,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때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때의 백제 국토는 북으로 강원도와 황해도 지역까지 올라갔으며 중국의 동진(東晉)과 교류하면서 산동반도에, 일본과 교류하면서 큐슈지방에 각각 상업세력권을 형성할 정도로 대외활동도 활발했다.

그렇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하여 훗날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침입을 받아 국기(國基)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대 시련을 겪게 된다.

여하튼, 백제로서는 가장 강성했던 전성기였는데, 다른 부분은 일단 접어 두고 백제와 일본 간의 상호관련된 부분만 확대 조명해 보기로 하자.

위에서 보듯이 일본의 큐슈지방에까지 진출해 사업세력권을 형성했다고 했다. 그 당시 백제와 일본은 그만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얘기다.

문명과 문화의 속성을 따져 본다면 대륙의 그것이 한반도를 경유하면서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파됐을 것이란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잠깐 에가와 나미오[江上渡夫]씨의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소개해 본다. 완전히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기마민족설이란 기마민족인 부여족(夫餘族)의 한 일파가 남하하여 백제의 한 세력이 되었으며, 이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토착 세력을 정복하고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을 수립했다는 내용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552년에 백제의 성왕(聖王)이 불상과 경론을 보내 왔는데, 이 불상을 당시 대긴인 소아도목(蘇我稻目)의 집안에 안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588년에는 백제에서 사신과 함께 승려인 혜총(慧聰), 영근(永根), 혜식(慧植) 등이 사리(舍利)를 가지고 왔는데, 이때 율사(律師), 사공(寺工), 와박사(瓦博士), 노반박사가 함께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권3 추고기(推古記)에는 비조사(飛鳥寺)의 탑에 사리(舍利)를 묻을 때, 소아마자(蘇我馬子) 이하 대관들이 모여서 의식을 치르는 대목이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참가한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식 의상을 입으니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칠지도(七支刀)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두번째로 일본인들이 제시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 하나의 근거인 칠지도(七支刀)에 대하여 알아보자.

칠지도(七支刀)는 도신(刀身) 좌우 양측에 칼날이 세개씩 가지처럼 뻗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길이는 75cm의 단철로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녹이 슨 채로 방치되어 전해오다가, 1870년대에 신궁의 대숭사로 있던 스가마사도모[菅政友]씨에 의해 명문(銘文)이 해석되었다.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로 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명문(銘文)을 해석한 내용을 보자.

泰和四年月十一日 丙午正陽 造百練七支刀 生劈百兵 宣供供侯王 ????作

'태화(泰和) 4년 4월 11일 병오(丙午)의 날 정양(正陽)에 백번을 달군 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백명의 군사를 능히 물리칠 수 있으니 후왕(侯王)들에게 베풀어 공급할 만하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滋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先世)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의 국왕과 세자가 성음(聖音)에 얹혀 살았으므로, 왜왕(倭王)인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後世)에 길이 전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칼을 바친 백제의 국왕은 초고왕(肖古王)이고 얹혀 살았던 세자는 귀수(貴須)라고도 했다. 그리하여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칠지도(七支刀)가 바로 이 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칠지도 관련해서 칠지도가 보존되어있던 석상신궁의 궁사가 칠지도의 검에 새겨진 명문이 너무나도 궁금한 나머지를 글짜를 칼로 긁어가면 읽었다는 허접한 잡소리는 불편한 글자를 지워 버린 작태로 마치 만주 집안의 광개토대왕의 훈적비를 회칠해서 변조하고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제국의 잡짓에 불과한 것이다.

새암출판사의 '고기(古記)로 본 한국 고대사'를 저술한 한순근(韓順根)씨의 주장을 참고할 필요성이 있다.

"...백제 국왕이 신공왕후(神功王后)에게 칠지도(七支刀)를 준 시기에 대하여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신공왕후 52년으로 적혀 있고 칠지도에는 '泰( )四年'으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九台百濟)가 건국된 서기 204년 10월경부터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이 붕괴된 서기 247년 사이 중국의 연호 중에서 '泰( )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나라의 '太和四年(서기 230년)' 뿐이다. 따라서 '泰( )'는 위나라의 연호이고, 구태백제왕(九台百濟王)이 신공왕후에게 칠지도를 준 연호는 위나라의 '太和四年'이다.(太와 泰는 같이 쓰인다.)

그런데 일부 사학자들은 칠지도(七支刀)에 적혀 있는 '泰( )四年'을 동진(東晉)의 '太和四年(서기 36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들은 칠지도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52년조에 '손자 침류왕(枕流王)에게 일러...'라는 문구가 나오고,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년)의 조부가 근초고왕(近肖古王)인 것에 근거하여 백제가 신공왕후(神功王后)에게 칠지도를 준 때는 근초고왕의 치세(治世) 때이고, 근초고왕은 서기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泰( )四年'은 동진(東晉)의 '太和四年(서기 369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신공왕후기 52년조의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이후 문구는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여 일어난 착각이다...'

첫째, 앞면에 새겨진 명문 중에 '후왕(侯王)'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후왕(侯王)이란 말 그대로 제후(諸侯)를 의미한다. 황제(皇帝)가 번국(藩國)의 왕(王)에게나 쓰는 호칭이다.

일본인들 말대로라면 백제에서 진상했다는 물건에 군국(君國)의 군주가 신국(臣國)의 군주에게 사용하는 후왕(侯王)이라는 표현이 쓰여져 있다는 모순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왕(倭王)은 백제(百濟)의 제후(諸侯)이며 칠지도(七支刀)는 일본이 백제의 종속국(從屬國)이었다는 역증거(易證據)가 되는 셈이다.

마지막 귀절인 전시후세(傳示後世)의 용법을 보자.

이 말은 군국(君國), 혹은 종주국(宗主國)의 군주가 신국(臣國), 혹은 종속국(從屬國)의 군주에게 물건을 하사(下賜)할 때 쓰여지는 표현이다. 즉 좋은 물건이니 간수를 잘하여 길이길이 보존해야 한다는 당부의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다.

군국(君國)의 통치자에게 쓰는 말로는 예의에 어긋나는 용례(用例)이다. 즉 헌상하면 그만이지 거기에다 꼬리를 달수는 없는 일이고, 보관하다가 남에게 다시 선물로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다. 결국 용례상 강요의 의미가 내포된 하대(下待)하는 어법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놓고 벌어지는 한,일 간의 논쟁이 완전히 본말(本末)을 뒤집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일본이 신라와 가야를 비롯한 7개국을 평정해 그 일부 영역을 백제에게 주었으므로, 이에 백제 국왕이 영원한 복속을 맹세하며 칠지도(七支刀)를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서는 백제의 왕세자가 일본에서 얹혀 살았으므로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되어 있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으려는 듯, 先世以來 未有此刀라고 못을 박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전에는 이러한 칼이 없었다.'는 뜻인데, 즉 태화(泰和) 4년(서기 369년) 이전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스운 것은 이러한 칠지도에 근거해서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정사(正史)로서의 권위도 한풀 꺾인 채 무려 120년이라는 세월을 수정했던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사기(詐欺)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설사 일본인들이 양심을 되찾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철회, 칠지도(七支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연대만은 확실히 남는 꼴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일본인들은 심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 아닌가?

한편 칠지도(七支刀)가 사라져야만 할 운명이 무엇에 근거했던가? 상식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즉 그것을 제작한 동기가 상이하다는 점, 일본이 오히려 백제의 종속국(從屬國)이었음을 시사하는 후왕(侯王)이라는 의미, 그리고 기(奇)라는 글자에 대한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해석, 또한 전시후세(傳示後世)의 용례(用例)가 그것이었다.

상식적인 해석으로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서기가 비집고 들어 가야할 시대폭도 한층 좁아지게 되었다.

결론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일본의 남선경영(南鮮經營)이 시작되는 서기 369년 이전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것이 없다.[先世以來 未有此刀]

둘째,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관청이 한반도 남반부에 세워진 시기는 공교롭게도 백제가 가장 강성했던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년)의 재위시절이었고, 이어서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재위시절이었으며, 이어서 신라가 한반도 삼국의 주역으로 서서히 고개를 드는 법흥왕(法興王), 진흥왕(眞興王)의 재위시절이기도 하다.

- 네이버 지식에서 부분 발췌

따라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한마디로 천무왕(天武王, 673~686년)이 일본국과 일본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백제와 역학관계를 주종관계를 역전시켜서 상국인 백제를 의도적으로 폄하한 불가사의한 역사서이다. 전 세계의 모든 역사서 중에 일본서기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사서는 없다.

국가 성립의 가장 중요한 사기인 3새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본서기는 시종일관 주야장창 백제에 관련된 사초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러한 불가사의의 하이라이트는 일본은 신라와 고구려를 시라기 고마 고라이라고 읽는 반면에 유독 백제(百濟)만 하규사이나 뺘구쟈이로 읽지 않고 <구다라> 라고 읽는다는 것이고 그 절정은 백제 멸망이후 일본서기가 장탄식을 내뺏으면 조상의 묘를 어찌 다시 가볼 것인가? 라고 한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기 663년 최후의 거점인 주유성(州柔城 또는 周留城)이 함락되자, 일본열도에서는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에도 이제 다시 못 가게 되었구나."라는 비통의 노래가 유행했다고《일본서기》(663년 천지(天智)2년 조(條))는 기록하고 있다.

백재의 멸망이후 본국과의 관계를 끊고 열도 내에서 유일한 만세일계의 황통 일본으로 거듭나는 역사적 작업을 동반하면서 일본서기의 많은 부분을 교정하였으나 오늘날의 현상에서 되짚어봐야 할 내용으로 당시에 간과하고 수정하지 못한 많은 부분들이 남겨져 있다.

임나가야 일본부는 일본의 한반도의 남부를 경영한 근거가 아니라 적어도 단독적으로 가야이거나 아니면 당시의 강국 백제의 관청으로 상국인 백제에서 신하국인 일본으로 건너가는 많은 사람들의 인적 관리를 맡았던 요즘으로 말하자면 영사부같은 관청이지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권력의 실존세력이 아니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