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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역사, 역지사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김정호(金正浩)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김정호(金正浩)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실린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지도, 최고의 지리학자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가 유명해진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수록한 후부터이다.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에 관해서는 조선을 침탈한 일제조차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고자 전국을 측량하여 5만분의 1 지도를 만들었는데 대동여지도와 비교했더니 별 차이가 없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당시에 군사용으로 사용했다, 토지침탈시 측량에도 이용했다는 등 여러가지 일화가 알려져 있다.

 

 

김정호는 어떤 사람인가?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졌던 점들이 많다. 우선 김정호가 지도의 중요성을 알고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홀로 백두산을 7차례 오르내릴 정도로 방방곡곡을 다녔다든가, 대원군이 대동여지도의 정밀함을 보고 지도 목판을 불태우고, 김정호는 국가기밀 누설죄로 투옥시켜 결국 그가 옥사하였다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金正浩 ?~1866)가 만든 지도이다. 고산자(古山子)는 김정호의 호.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이 이야기들은 [조선어독본]에 나온 것인데 일제가 조선을 폄하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대동여지도는 주로 현지 답사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라기 보다는,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된 지도와 민간 소장 지도 및 여러 지리지 등을 섭렵하여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1861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었다.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1840년대),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 1834년), 동여도(東輿圖, 1857년)를 제작하였으며, 전국지리지인 동여도지(東輿圖志, 1834∼1844년), 여도비지(輿圖備志, 1853∼1856년), 대동지지(大東地志,  1861∼1866년) 등을 편찬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목판본 (1861년) 보물 제 850호로 지정된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전체 지도 중 1책의 순서가 편집되었다. 오른쪽은 현재의 서울 부근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는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지도로 크기가 6.7m x 3.8m 이다. 지도는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한 면으로 총 227면으로 구성된다. 2면이 1판으로 제작되어 이러한 판이 동서 19, 남북 22단으로 배열된다. 목판 한 장에는 지도 2면을 앞뒤로 새겨 넣어 총 60장의 목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목판은 12장(보물 1581호)으로 국립중앙박물관 11장(25면), 숭실대기독교박물관 1장(2면)이 남아 전한다.

 

대동여지도는 남북 22단으로 나뉜 한 단이 각각 하나의 책자 형태로 나뉘어 제작되어 있다. 이 책자 하나를 ‘첩’이라고 하는데, 한 첩은 약 20 x 30cm정도로 휴대하기 부담 없는 크기이다. 따라서, 전체는 총 22첩이 되는데, 한 첩에 담긴 지도를 펼치면 한반도의 동서가 펼쳐지고, 연이은 첩을 상하로 잇대면 남북이 이어진다. 각 첩의 표지에 이 첩에 담긴 주요 지명을 표기하여 필요한 부분만 쉽게 찾고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동여지도가 다른 지도와 달리 필사가 아닌 목판본으로 제작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 목판으로 만든 이유는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이기도 하지만, 도성도와 한성부지도(京兆五部)의 상세 지도가 별도로 추가되어 있다. 요즘으로 보면 전국 지도에 서울 시내 지도와 수도권 지도가 따로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사용자의 편리를 고려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별도로 추가되어 있는 상세지도. 한성부지도와 도성지도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의 축척에 관한 학설

대동여지도는 모눈을 그려 축척을 표시한 지도이다. 범례부분에 가로 8개, 세로 12개의 눈금을 그려 ‘한 칸은 10리(每方十里)’, ‘한 면은 세로 120리, 가로 80리(每片 縱一百二十里, 橫八十里)’, 한 칸에 사선을 그어 ‘14리(十四里)’라고 축척을 표기하였다. 그러면 대동여지도는 현대적 의미로 얼마의 축척을 갖는 지도였을까? 문제는 10리가 몇 ㎞인가를 아는 것이 주된 관건이다. 대동여지도는 100리를 1척(尺), 10리를 1촌(寸)으로 하는 ‘백리척(百里尺)’ 축척의 지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1촌, 1보(步)가 현재의 몇 ㎝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축척을 계산해 내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는 10리를 약 4㎞로 환산하는데, 이것은 구한말 이후 일본의 거리기준이 도입된 이후에 정해진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인 19세기의 거리기준으로, 10리를 4.2㎞와 5.4㎞로 보는 2가지 견해가 있다. 10리를 4.2㎞로 보는 견해는 지도의 크기와 실제 지표면의 크기를 대비하여 계산한 것이고, 5.4㎞로 보는 견해는 19세기 경위도 1도의 거리관계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얻은 값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전자에 따르면 160,000분의 1, 후자를 따르면 216,000분의 1 의 지도가 된다.

 

 

범위와 세밀함을 겸비한 대동여지도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군현지도, 방안지도(경위선표식 지도), 목판지도, 절첩식지도, 휴대용지도 등의 성과 및 장점들이 독자적으로 종합된 전국지도를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지도는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발전하였는데, 하나는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이후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와 관아가 중심이 되어 제작했던 상세한 군현지도이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들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 두 계열 지도의 장점만을 결합,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한 내용을 갖춘 일목요연한 전국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기호표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의 축척표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이러한 것이 가능하였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바로 함축적 의미가 들어있는 독자적 기호의 사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동여지도는 도면의 글씨를 가능한 줄이고 기호화된 지도표(14개 항목 22종)로 표기하여 11,760여 개의 지명을 간결하게 수록하였다. 즉 능․역․산성 등 명칭을 기호로 표시하였을 뿐 만 아니라, 옛 지명들도 표시하여 역사지리적인 정보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산은 독립된 산이 아닌 산맥(산줄기)으로 표시하였으며, 산줄기의 굵기로 산의 크기와 높이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물길은 단일곡선과 이중곡선 2가지로 표현하였는데 단일곡선으로 된 것은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 이중곡선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여행시 걷기와 배타기를 고려하여 계획을 짤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다.

 

도로는 곡선인 물길과 달리 직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목판에 먹을 묻혀 찍어내는 단색 지도인 대동여지도의 특성을 고려하여, 물길과 도로의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도로에는 실제 거리 10리마다 점을 찍어 두었는데, 비교적 곧은 길은 점 간격이 넓으며, 산악지형이나 꼬불꼬불한 길인 경우는 점 간격이 좁다. 이를 통해 두 지점 사이를 실제로 걸어갈 경우 걷는 거리와 도로의 상태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대동여지도는 국토를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실학적 지식으로 국가의 사회, 경제, 공간 구조를 반영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동강지도의 광주 주변. 아래쪽에 영산강 줄기가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 광주, 가운데에 장성, 왼쪽 위에 고창이 보인다.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의 대구 부근. 왼쪽의 큰 강이 낙동강이다. 남쪽부터 창녕, 현풍, 대구, 칠곡 등이 보인다.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화폐 도안으로 검토되었던 대동여지도

지난 2009년 10만원 권 화폐 도안으로 대동여지도를 쓰려다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 이유는 대동여지도 목판본에 독도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분명히 독도를 알고 있었고, 이전에 제작한 청구도에 독도를 표기하였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다. 대동여지도가 목판으로 제작되어 정확한 축척의 위치에 독도를 표기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의 추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정호의 업적을 기념하여 천문학자인 전영범이 2002년 1월 9일 보현산천문대에서 발견한 소행성 95016의 이름을 김정호(Kimjeongho)라고 지었다. 김정호는 하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