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중국에 관하여'(On China) 중에서
1946년11월에 중공 팔로군과 동북민주연군이 통합하여 민주국군으로 편성된다. 중국인력 24.5만명에는 이러한 동북민주연군의 조선인 병사가 다수 포함된 숫자이다. 그 당시 소련이 시베리아에 억류한 일본군 포로는 1백만명이었다. 그 중 사회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1.5만명 지원병으로 부대가 편성된다.
중국내전의 향방은 만주의 장춘, 선양, 북경-천진 전쟁에서 장개석군 300만 중에서 정예군이 주로 포함된 200만이 붕괴되면서 결정된다. 그 당시 미군은 산동에 10만, 천진항 등 주요항구와 도시에 5만의 해병대가 진주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요동반도 대련-여순에 진주한다. 소련은 얄타회담을 통해 대련-여순 조차지와 만주 철도에 대한 권리인정을 루즈벨트와 합의했다. 당시 만주는 산업화된 지역이고 이에 반해서 중국 본토는 대부분 농업종사지역이었다. 소련이나 미국이나 전략적으로 만주는 매우 중대한 곳이다.
일본 항복 2주 전에 얄타회담의 합의에 의해 참전한 소련의 전격적인 만주침공 이후에 만주지역은 기존 동북항일연군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북민주연군들이, 소련군이 넘겨준 관동군과 만주군의 군사장비로 무장하게 된다. 대신 국민당군은 미군에 의해서 행정권이 있는 대도시를 소련으로부터 이양받아 정예 사단들을 공수하게 된다.
소련군은 1947년 4월 만주에서 철수하여 일부는 조차지로 인정된 대련, 여순항으로 가거나 일부는 북으로 들어간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보면 전략적으로 매우 난감한 위기였던 셈이다.
산업화된 만주와 북한이 소련권으로 넘어가고 농업지역인 중국본토조차도 연안의 모택동 정부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국내전에서 미국이 장개석정부를 지원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군 15만 부대가 산동성과 주요항구에 포진했지만 직접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택동군을 철저히 돕는다
만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북경 북쪽의 장작코우를 팔로군이 통과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 장비가 적재된 곳으로 접근 가능하도록 먀샬이 허락한다.
전쟁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양쯔강개발계획 지원 차관의 부정과 횡령을 이유로 장개석 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지해버리고, 무기대여법에 의한 지원도 중지시키고 장개석 정부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내린다. 이러한 조치의 주동자는 마샬장군이었다.
장개석정부 패망과 관련된 청문회에서 매카시는 마샬의 조치가 장개석정부의 패망에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마샬은 마샬플랜으로 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한국전쟁 발발 후 3개월에 트루만에 의해서 국무장관에 오른 인물이다. 마샬플랜은 유대인 싱크탱크인 CFR의 작품이다. 국제연맹, 국제연합, 나토, 마샬플랜, IMF 등도 모두 CFR이 산출한 것이다. 트루만을 이기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오르자 CFR 수장이던 덜레스가 국무장관에 오른다.
동생 웰쉬 덜레스는 중국이 공산화로 기울자 CIA를 저강도 전쟁수행에 알맞게 혁신하기 위해 덜레스-코레아 백서를 발간하여 개혁을 주도하여 정보와 공작을 통합하고 외부 견제와 감시를 무력화시킨다.
미유대의 세계전략으로보면 그 당시 산업화가 집중된 만주와 북한의 소련권 편입으로의 진행은 가장 우선 순위의 전략위협이었다. 더구나 농업중심의 중국본토 내부에는 모택동 세력이 토지개혁을 무기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장개석정부에 대한 재정지원 중지, 무기대여법 적용 중지, 그리고 미국과 타국으로부터 무기수입봉쇄 조치를 내리게 된다.
미국이 모택동 중공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고 모택동은 청과 중화민국의 만주영토권을 소련이 침해하고 친소국가인 북에게 요녕성과 길림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에 미유대와 이해관계가 합치되는 것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7일 시판된 저서 '중국에 관하여'(On China)에서 스탈린이 당시 남침 계획에 'OK' 사인을 주면서 "미국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고 했다. 키신저는 스탈린이 태도를 돌변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스파이망을 통해 입수된 미국의 대(對) 아시아정책을 담은 극비문서가 중요한 배경이 됐다고 여러 외교문서와 자료들을 바탕으로 진단했다.
이 문서는 'NSC-48/2'라고 명명된 문서이다. NSC는 미국의 국가안보정책을 결정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약자로 NSC-48/2는 NSC 참모들이 입안해서 1949년 12월30일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안보정책 보고서이다.
이 문서는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 외곽에 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미국의 극동방어선 대상을 일본에서 필리핀까지로 하고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은 1950년 1월12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밝혀 알려진 사실이다.
키신저는 미국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힌게 이 NSC-48/2 극비문서의 입수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키신저는 "이 문서가 극비문서로 분류돼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분석가들에게 특히 신뢰감을 준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한편, 키신저는 NSC-48/2 보고서의 목적과 당시 애치슨 장관의 연설은 중.소 갈등을 야기시키고 양측을 이간질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고 설명했다.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장기적으로 중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존재는 소련이라고 규정했고, 소련과 분리된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 티토와 같은 노선을 밟아야 한다는 점을 공공연히 제안했다고 키신저는 설명했다.
애치슨은 특히 "동서간 과거 관계는 끝났다. 이제 그 관계는 상호 존중과 호혜의 관계로 가야 한다"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중관계 정립에 대한 비전을 제안했다고 키신저는 강조했다.키신저는 "공산주의 중국을 향한 이 같은 비전은 닉슨 대통령이 정책으로 진전시킬 때까지 그후 20년동안 미 행정부에 의해 더 진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70년 미.중 국교정상화 구상의 씨앗이 애치슨 연설과 NSC-48/2 문서에서 뿌리가 내려졌다는 키신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키신저는 "애치슨 연설은 대부분 스탈린의 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구성됐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이후 마오쩌둥에게 애치슨 연설에 대해 "중상모략"이라고 강력히 비난하는 입장을 발표할 것을 종용했지만, 마오쩌둥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고 며칠 후 스탈린의 요구보다는 훨씬 낮은 톤으로 애치슨의 제안을 거절하되, 중국의 선택지를 열어두는 입장을 취했다고 키신저는 전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56년 12월 소련과 거리를 두는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했다고 키신저는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