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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역사, 역지사지

한국말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

동양삼국에서 지금 중국으로 불리우는 대륙에서 또 일본에서 한국말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이 많다는 사실은 실은 그 시대 그 지역에서의 주도적 역활을 했다는 증거일터..

중국인들에게 물으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이 나침반(羅針盤)이고 일본인들에게는 백제(百濟)이고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통영 나전칠기(螺鈿漆器)이다.

1) 나침반(羅針盤)은 글자구성이 그물 나(羅) 바늘 침(針) 소반 반(盤) 으로 되어있는데 바늘침과 소반 반은 이해가 되나 왜 그물 나자가 들었는지는 동양삼국의 한자권 중국인들도 모른다. 한국인들도 모른다. 일본인들도 모른다.
본래 신라특산물로 신라침반(新羅針盤)이라고 써야하는 것이다. 자(滋)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이 자석인데 여기에 쇳조각을 부비면 자성을 띤다.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신라침반인데 신라의 특산물이다. 자지방은 대륙에 있다. 후대에 신(新)자를 떼어내서 알 수가 없는 형태로 남았다.

2)나전칠기(螺鈿漆器)는 문자구성이 소라 나(螺) 비녀 전(鈿) 옷 칠(漆) 그릇 기(器)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개껍데기로 무늬나 모양등 장식을 만들어서 장이나 문갑등에 상감으로 올리고 그 위에 옷칠로 마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라 나, 옷 칠, 그릇 기는 통용되나 왜 느닷없이 비녀 전이 나오는건지 작은 소품 비녀를 칠기로 안 만들었다고는 할 수없으니 칠기비녀도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나전칠기의 주제품은 커다란 가구류이다. 원 어의는 신라전칠기(新羅傳漆器)라고 본다. 의미는 신라에서 전해진 칠기라는의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성유기>처럼 <통영칠기>라고 고유화해야지 부득불 나전칠기라고 못박을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신 자가 탈락한 이후 라전칠기(羅傳漆器)를 견강부회하여 의미를 비슷하게 연결해서 현재 부르는 나전칠기(螺鈿漆器)로 부르는 것이다.

3) 오늘의 본론인 일본인들이 잘 모르는 말 구다라(くだら 百濟)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겠다. 쓰기는 백제(百濟)로 쓰고 읽기는 구다라(くだら)로 읽는 나라이름 구다라 왜일까?

일본말로 구다라나이=くだら(百濟)ない 라고 하면 한국말로는 <백제없다>인데 그 사전적 뜻은 무엇인가???

1) 소용없다.
2) 가치가 없다.
3) 시시하다.
4) 쓸모 없다.
등의 뜻이 있다.

그냥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고 하면 잘 눈치 챌 수가 없는데...이걸 漢字(간지)로 써 넣으면 우리에게는 의아해지고 일본인들에게는 실질적으로는 매우 당혹스러운 문장이다.

일본말로 고대에 교역했던 우리나라 삼국들의 이름은 新羅(しらぎ)는 <시라기>라고 읽고 高句麗(こうくり)는 <고구리> 또는 <고마>라고 읽는다.

대체로 우리가 읽는 발음의 음가와 아주 다르지않고 아주 유사하다.

신라는 <시라기>, 고구려는 <고구리>라고 읽고. 그런데 어째서 일본인들은 백제(百濟)라고 써놓고 이걸 읽을 때는 <하꾸자이>나 <빠꾸사이>로 읽지않고 전혀 다른 음가인 くだら<구다라>라고 읽으며 우리 말로 <백제가 없다>라는 그 뜻은 어째서 <쓸모없다, 소용없다>라는 전혀 엉뚱한 뜻을 갖게된 것일까???

일본인들은 유전인자 속에 이걸 의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전혀 이런 표현에 다른의미를 생각해보는등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우리는 좀 다른 각도로 보아야 한다.

일본의 정사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좀 알다가도 모를 역사책이다. 이것 역시 일본인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눈치 채었다해도 모른채 할것이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백제가 멸망한 7세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기사를 백제로 시작해서 백제로 끝나는 기묘한 역사책이다.

일본국내의 역사를 다룬 책속에 대부분을 백제에 대해 할애하고 말하고 있다면 무슨 뜻일까?

물론 후대의 가필에 의해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니 노예를 보냈다느니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느니 <임나일본부의 조>를 바치고 속국이였다느니 하는 위조된 사실을 슬쩍 끼워넣기는 했지만 워낙 철저하게 변조를 하지 못해서 원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런 흔적들이 역시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7세기라는 표현의 중차대한 점은 바로 660년 백제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 재위 20년만에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AD 660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여자왕으로 <제명>-사이메이는 백제의 부흥을 돕기 위해 일본 남부로 황거를 옮기고 병력을 동원하여 대거 백제로 보낸다. 그러나 천운이 따르지 않아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 때 일본서기는 뭐라고 사서에 기록하였는가?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 『日本書紀』「齊明天皇」).” 라고 하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마저 함락되자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 (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 (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 (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 (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 (豈能復往)

"이제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다하였으니 이제 앞으로 조상의 묘는 어떻게 찾을 것이며..." 라고 마치 자기나라가 망한 듯 비통하게 장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야마도(倭)는 대규모의 변화를 꾀한다. 율령을 반포하고 체제를 정비하고 성곽을 쌓고 그리고 국호를 <일본> (日の本= 히노모토)으로 개명하고 새로운 나라 <일본>을 만들어 간다. 야마도의 나라, 왜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망국의 한을 품고 백제의 이름이 끊김으로 백제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자탄조의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구다라>는 어떻게 나온것일까?

7세기 이전에는 일본열도는 주지의 사실인 것처럼 정복 기마 왕조 백제의 식민속국으로 복속하였으며 백제에는 <日宮部>라는 행정조직이 있어 일본 왕실을 관리했던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잠깐++

국내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이 <日宮部>를 있는 글자 그대로 日宮 일본왕실을 관리하는 지금의 일본의 <宮內廳>같은 것으로 해석치 않고 부득히 천문지리를 관찰하고 왕에게 보고하는 관리부서라고 애써 해석하려 한다. 천문지리를 관측하는 부서였다면 한자의 성립구조를 보면 누가 뭐라해도 <日月部>가 제격인데 이 편한 표현을 피해 굳이 <日宮部>라고 했을까? 
백제가 일본을 관할 통치했다는 것이 인정하기에 부담스러운 것일까? 또 하나, 하남시에 백제의 궁터지로 알려진 <춘궁지>가 있다. 이것 역시 식민사학의 소산으로 <春宮>으로 사계절 궁궐의 하나인 <궐>로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부득이 <春窮里>에다가 빗대 봄이 넘어갈 무렵 어렵던 것을 말하는 <춘궁>에서 유래된 마을이름에서 연유했다고 다소 의도적 폄하를 하고 있다.-++++

이는 백제의 왕자나 호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관활 통치했을 것이다. 백제는 <담로>제도가 있어 왕실의 가제종친들에게 영토 정복 후 지역을 나눠어서 통치하게 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몽고, 나중의 원나라가 중앙아시아 일대를 점령하고 XXX칸이라는 여러나라를 만들어 왕자들이 분할 통치하다 끝내는 모두 독립된 국가로 발전한 것과 같은 것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회교도의 나라인 무슨무슨칸이라는 이름의 나라는 모두 몽골의 후예의 지배하에 있던 것이다.---


즉 일본으로 보면 백제는 <큰 나라>인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명절때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갈 때 단순히 <큰집>에 가자는 말 한 마디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을 의미하는지 특별히 지역이나 지명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공식명칭은 아니지만 그냥 큰집 간다고 하면 모든 식구들이 자연스레 XXX 동의 큰집을 가는 것으로 알고 이해가 된 것이다.

일본에게는 백제는 큰 나라였다. 바로 직활 통치를 주제하는 상국이였다. 백제의 왕자들이 건너와서 다스리고 다녀갔다. 따라서 백제는 언제나 모든 사람이 <큰나라>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우고 그렇게 다 잘 알아들었던 것이다.

일본은 후대에 문자의 정비를 하며 모음계를 현재와 같은 (아,이,우,에,오)로 모두 5개로 줄여버려 음가에 큰 혼란이 생겨나고 우리말에서 쓰고 있는 받침도 쓸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츠(つ)하나만 받침의 흔적을 찾아볼 수있다.

이런 과정에 후대에 언어에 음운변화가 생기면서 <큰 나라>가 점차로 변화하여 <구다라>라고 발음하는 현상이 생긴 것이라 생각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에서나 일본에서 우리말(고대조선어)로 해석하지 않으면 아직도 해석되지 않는 많은 언어들이 있다.

<구다라나이>라는 한쪽의 단편적인 언어에서 그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있는 것이 역사의 편린을 찾아내는 작업의 하나이다.

이것 말고 그 어떤 것이 <구다라나이>를 가장 적절하게 납득할만 한 내용으로 설득력있게 설명이 가능할까?

연구를 더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난 이걸 굳게 믿는다.

첨부: 나의 페친의 경청할만한 또 하나의 주장.

일본어에 구다라나이는 나쁜거..별볼일 없는 물건을 일컬는것입니다.. 구다라나이만 직역해보면 "백제아니다"아니면 " 백제없다"의 의미 입니다만원어는 "百済物ではない"" 구다라 모노 데와 나이""百済製ではない”"구다라 세이 쟈나이" 즉 백제물건이 아니야..백제製가 아니야 또 어느 가게에 들어 갔을때 백제물건이 없으면 에이 볼필요도 없어..뭐 그런뜻입니다입니다. 왜 선배님이나 저나 옛날에는 미제하면 좋은 물건이야 란뜻으로쓰였지요?? 뭔가 물건을 과시하거나 자랑스러울때는 이거 미제야 만지지마라고 하였지여?? 바로 그뜻입니다..ㅎㅎ

추신1): "百済物ではない(구다라 모노 데와 나이)" 가 원래 세간에서 사용되였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배경으로 설명해야하는 내용의 중요한 포인트는 <百済(구다라)>에 대한 내용임.

추신2):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 부르고 구다라가 '큰나라'의 뜻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말이다.

'크다'의 옛말은 '그다' 또는 '거다'이다. 옛날에는 모음의 구분을 지금처럼 세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다' 또는 '거다'를 세게 발음하면 '크다' 또는 '커다' 이다. '큰' 또는 '커다란'이 여기에서 온 말이다.
백제의 영토를 가장 많이 넓힌 근초고왕의 '근'은 '큰'이다. 근초고왕은 큰초고왕,초고대왕이란 뜻이다.

마한의 왕을 '건길지'라고 했는데 이 '건'도 '큰'이라는 뜻이다. 길지가 왕이라는 말이므로 건길지는 큰왕, 대왕이라는 말이다. 단군조선이 망하고 그 잔여세력 중 일부가 북쪽에서 내려와 마한의 건길지를 알현하여 거두어 주기를 청원하자 태백뫼줄기 건너편의 동쪽 땅을 조금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이들이 뒤에 진한으로 발전한다.

또 한무리가 내려오자 동남쪽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하였는데 이들이 뒤에 변한으로 발전한다. 진한과 변한의 통치자는 건길지가 그의 왕족 중에서 임명하였으며 매년 세공을 했다.'구다라 나이'라는 말은 '백제의 것이 아니다' 라는 일본말이다. 일본의 귀족과 지배층은 백제 큰나라의 문물을 들여와 사용함으로써 신분을 과시하였으며 모두들 '구다라'제품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그러나 항상 '구다라'제품이 귀했기 때문에 구다라 제품이 아닌 것도 구다라제품이라고 속이는 경우가 발생했고 그래서 '구다라 나이'라는 말이 생겨 오랫동안 쓰였다.

일본지성이 시인한 백제는 일본에게는 큰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