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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포르투갈어: Era dos Descobrimentos, Era das Grandes Navegações)

서구의 관점으로 일컫어지는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는 발달된 항해술로 인한 인도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일관한 대항해의 결과는 새로운 식민지 건설과 후속 식민지 쟁탈에 박차를 가하고 그 결과로 그들이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황인종 북미 인디언과 남미 인디오의 땅 일명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에 의해 초토화되고 차례차례식민지로 점령되었다.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아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그 다음은?? 팍스 차이나?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포르투갈어: Era dos Descobrimentos, Era das Grandes Navegações) 또는 대발견 시대(영어: Age of Discovery)는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던 시기를 말한다.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과 같은 지리적 발견을 달성했다. 이 시기 이전에 정화의 대항해 등, 해상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유럽인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편협한 용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히크가 처음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당대의 유명한 탐험가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가마,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바스코 발보아, 존 캐벗,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 후안 폰세 데 레온, 페르디난드 마젤란, 빌럼 바런츠, 아벌 타스만, 빌럼 얀스존 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 역할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많은 무명 탐험가들이 있었고 에르난 코르테스, 프란시스코 피사로 등 탐험가를 표방한 잔인한 정복자들도 있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항해 기념비.


대항해 시대는 르네상스의 신기술과 사상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부분은 지도학, 항해, 화력, 조선 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 서쪽으로 항해해서 아시아로 가고 싶어했다. 가장 중요한 발전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락과 캐러벨이 발명된 것이다. 이 배들은 중세 유럽의 범선을 기초로 하여 지중해, 북유럽 선박의 혁신적인 점과 아랍적인 부분을 추가했다. 그리고 지중해를 떠나 대서양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최초의 배였다.

대항해 시대가 한창일 때, 포르투갈의 상선들은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총을 노예들로 바꾸어,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 팔았고, 한 척에 500명 이상의 노예들을 싣고 아메리카로 떠났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속에서 질병과 싸워야만 한다. 이들 노예들은 아메리카의 대규모 설탕이나 사탕수수 농장 아시엔다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대항해 시대’라고 그럴듯하게 부르는 것은 사실상 신대륙 발견도 아니었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도 아니었다. 비유럽, 비기독교 세계의 식민 지배의 시발점이었으며, 인류가 사리사욕을 위해 글자 그대로 무자비한 정복을 하게 된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유럽은 노예 무역을 통해 자본을 쌓았으며 강제 이주를 통해 신대륙을 개척하였다.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 (European Colonization of the Americas)는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를 이식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를 점령했다. 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경영한 목적은 금은의 채굴이었으며, 국왕의 직할 지배 아래 영위(營爲)되었다.


1750년대의 유럽 열강에 의한 아메리카의 식민지 및 영유권 주장


네덜란드는 서인도 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시 맨해튼 섬과 허드슨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1년에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 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를 주로 한 것으로, 인구도 적은데다, 국왕의 직접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캐벗의 북아메리카 동안(東岸), 체사피크 만 부근의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험프리 길버트나 월터 롤리에 의하여 행해졌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없었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707년에 제임스 하구(河口)에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하여,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건설이나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나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개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은 149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가장 먼저 탐험과 정복에 나선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이었다. 1492년 레콩키스타를 끝낸 직후, 토르데시야스 조약 통해 두 왕국은 유럽 외의 모든 영토를 둘로 쪼개는 권리를 교황에게서 인정받게 되었다. 경도선을 따라 대서양과 현대의 브라질 동부를 가른 이 조약과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의 태평양 발견(1513)으로 스페인은 아메리카 전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성립하게 된다. 스페인 정복자(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텍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 그 결과, 16세기 중반, 스페인 왕국은 남아메리카 서부의 광대한 영토, 중앙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남부와 일찍이 확보했던 카리브 해를 경영하게 되었다. 같은 때에 포르투갈은 동부 남아메리카를 차지하며 이를 브라질이라 이름붙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초기 아메리카 정복


스페인 제국 및 포르투갈 제국(16세기)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곧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거부하며 아메리카 정복에 나섰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6세기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 역시 영속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식민지는 스페인에 이미 정복되었거나 질병으로 인구가 몰살된 카리브 해, 플로리다 북쪽의 스페인에 정복되지 않은 북아메리카 일부에 자리했다.

북아메리카의 초기 유럽 식민지는 스페인령 플로리다, 스페인령 뉴멕시코, 잉글랜드령 버지니아(북대서양의 소머스 제도를 포함)와 뉴잉글랜드, 프랑스령 아카디아와 캐나다, 스웨덴령 뉴스웨덴, 네덜란드령 뉴네덜란드 등을 아우른다. 18세기에는 덴마크-노르웨이 제국이 그린란드의 식민지를 회복했고 러시아 제국이 알래스카를 획득했다.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아메리카 식민화로 이익을 얻게 되자 영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식민지 거주자들은 이웃 식민지, 원주민, 해적 등의 공격 위협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