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필요한 시대, 아웅산 수치
우리에게도 당분간은 영웅이 더 필요할 것이다.
The Lady
더 레이디(The Lady)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를 모델로 뤽 베송이 감독하고 2011년 개봉한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 드라마 영화이다.
양자경이 아웅산 수치를 연기했다. 아웅산 수치 연기를 위해 몸무게를 5키로 이상 감량하는등 최선을 다해 아웅산 수치를 연기했다고 한다
You may not think about politics but politics thinks about you
우리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도 정치는 우리를 그냥 놓아 두지 않는다.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àʊɴ sʰáɴ sṵ tɕì], 1945년 6월 19일 ~ )는 미얀마의 외무부 장관(2016년 3월 30일 ~ )이다. 비폭력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 미얀마 최대 야당인 민족민주동맹의 당수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며 라프토상과 사하로프상, 노벨 평화상(1991)을 수상했다. 2010년까지 미얀마 군사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 처분을 받았다. 타임지는 그녀를 철의 난초라고 불렀다.
1947년 6월에 암살된 버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인 보조 아웅산 장군과 킨 치 전 인도 대사의 딸로 당시 버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때 대학에서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났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과 관련 역사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다. 그 후로 27년 만인 2013년에야 교토대학으로 돌아와 특별 강연을 하게 된다.
수치 여사는 결혼 후엔 아들 둘을 낳고 교수 일을 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영국 옥스포드에서 철저히 가정주부로 살았었다. 옥스퍼드 대 출신으로 세계 어디에서도 무시당할 학벌이 아니었음에도 정말 아무 일도 안했던 완전 전업주부였기에 그러한 생활에 질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쯤엔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 등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62년 버마에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정이 들어선 이후 1988년 미얀마의 군사독재자였던 네윈 장군이 물러났다. 아웅산 수찌는 마침 그 해,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터였다.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랑군(현 양곤)항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신호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는 8888 항쟁이라고 불리며 1962년 네윈 장군의 쿠데타 이래 26년 만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였다. 유혈진압 닷새째 결국 군부는 지도부를 교체하며 정치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실각 위기를 기회로 삼아 1988년 9월 18일 소 마웅 장군의 신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화 운동은 네 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무자비한 대량 학살로 신군부는 정권을 재장악했다.
그 달 말인 9월 24일, 버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더 나아가 부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아웅산수찌는 민주화 운동 와중에 정치에 입문한 셈이었다. NLD의 설립을 도운 후 1989년 7월 20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그녀는 해외로 떠난다면 자유를 주겠다는 군부의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1990년 총선 당시 수치 여사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여사의 인기에 힘입어 총선 결과는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뒀으나 군정은 정권 이양을 거부한 채 독재 체제를 이어 나갔다. 1988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에 맞서 민족민주동맹(NLD)을 이끌었으며 1990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495석 중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고 수치 여사는 총리가 되어야 했지만, 군사 정부는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2005년 군부 개혁파이던 킨 뉸 총리가 발표한 미얀마 7단계 개혁개방 로드맵에 따라 2010년 총선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총선은 야당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실시되었고 결국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총선 승리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미얀마 군사 정권은 2010년 11월 13일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했다.
1991년 수치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치 여사는 가택연금에서 6년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의 여행을 금지 당했다.
2000년 9월부터 유엔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치 여사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치 여사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수 지 여사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해 수치 여사를 다시 구금했다.
2010년 11월 13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미얀마 군정은 수치 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의 손발을 묶어 야당이 보이콧을 선언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여당은 25%의 자동의석을 더하여 75%의 의석을 차지했다. 여당이 사회주의 경제를 풀고 경제개발 정책 시늉을 한 것도 한 이유이었다.
수 여사가 그야말로 미얀마 군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가택연금 조치에 그친 것은 물론 국제사회의 눈초리가 매서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얀마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아웅 산 장군의 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2012년 4월 1일에 치러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야말로 몰표 또한 NLD는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1년 5월 30일 양곤 저택에서 홍콩대 학생 및 교직원들과 가진 화상대화에서 미얀마 정치투어에 나설 계획을 밝히기도 했던 아웅 산 수찌는 6월 19일 2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66회 생일을 맞았다. 이 자리에서 아웅 산 수찌는 NLD 본부에서 조촐한 생일파티를 갖고 "내 소원은 미얀마의 평화와 안정"이라고 말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fear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의회에서 연설한 “네 가지 자유”(1941년 1월 6일)중 하나인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연설이다.
이 연설은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이러한 공포가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믿었다. “정치가들은 참 놀라운 존재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치가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라는 그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아웅산 수치의 21년만의 노벨평화상 수락연설
2012년 6월 16일 오슬로 노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