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기업 인수한 대아그룹 성완종 회장]
“기술력 자신, 중국·동남아 시장서 승부”
2004.01.03. 00:19
2백만원으로 30년 만에 매출 1조원대 그룹 일궈… “비전 있는 업종 계속 다각화”
글 이상건 기자 (sglee@joongang.co.kr)
지난 8월22일 올해 건설업계 M&A(기업 인수·합병)의 마지막 대어로 여겨지던 경남기업의 새 주인이 결정됐다. 경남기업의 지분 51%를 인수해 새 주인이 된 곳은 대아건설. 충청남도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중견 건설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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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건설업체가 전국적 기반을 갖춘 경남기업을 인수한 데 대해 건설업계는 물론 재계 관계자들도 깜짝 놀랐다. 대아건설의 숨겨진 ‘실력’에 새삼 놀라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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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기업 인수를 진두지휘한 주역은 성완종(52) 대아그룹 회장. 단돈 2백만원으로 건설업에 뛰어든 지 30여년 만에 매출 1조원, 계열사 10개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의 오너이자 최고경영자로 자리잡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대아건설로서는 경남기업 인수를 계기로 ‘지방기업’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중앙 무대인 서울에 본격적으로 입성하는 계기가 됐다는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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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거지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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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그룹 성회장의 학력은 초등학교 6학년 중퇴가 전부다. 한국 재계의 1세대 기업인 중에는 더러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50대 초반 기업인으로는 좀체 보기 드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인생 굴곡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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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성회장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별다른 일 없이 지내던 성회장은 12세 때 서울에서 파출부 생활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상경, 신문 배달과 약 배달을 시작했다. 배달로 밥벌이를 하면서 영등포교회 부설 야간학교를 다녔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주경야독으로 마친 후 성회장은 다시 고향인 충남 서산 해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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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내려가 그가 첫번째로 한 일은 화물영업소에서 화물 트럭을 불러주는 일. 화물차 한 대 불러주면 1천원을 수수료로 받았다. 악착같이 일해 3년 만에 2백만원의 목돈을 만들었다. 그 무렵 서산토건이라는 자그만 건설업체를 운영하다 해미농협조합장에 선출된 서산토건 사장으로부터 자신의 회사 지분을 인수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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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2백만원에 자신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라고 하더군요. 평소 저를 눈여겨봤던 모양입니다. 건설 일은 자신이 가르쳐줄 테니 우선 회사부터 인수하라고 해 무작정 건설업에 뛰어들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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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장은 조합장의 코치에 따라 기초부터 하나하나 건설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난 1975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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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업체에 비해 자금이 부족한 그는 처음부터 ‘원칙’을 무기로 입찰 경쟁에 나섰다. 건설업계의 오랜 관행인 향응과 접대에도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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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향응과 접대 없이는 건설업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관행이 그렇다 해도 최소한의 법은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납하지 말라고 하니까 현장소장들의 불만이 대단했죠. 그래서 그랬죠. 그렇게 어쩔 수 없다면 법에서 동정받을 수 있는 명분을 쌓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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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응 등 기름칠(?)을 못해 답답하다며 회사를 떠난 현장 소장들도 있었지만 그는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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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은 원칙주의자인 성회장을 가만 두질 않았다. 그에 대한 중상모략이 시작된 것이다. 공사 입찰 시 절대 양보하지 않는 그의 승부 근성도 건설업계 선배들은 못마땅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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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놈이 까분다, 교만하다 등 끊임없는 비난에 시달렸죠. 한마디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더라고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선배라면 후배들의 손을 잡고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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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그는 검찰에 불려가는 일을 당하게 된다. 지난 86년 ‘정치권에 로비를 했다’는 이유로 4박5일 동안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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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정말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죠. 저는 검찰 조사가 그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습니다. 검사가 조사를 마친 후 저에게 ‘알고 보니까 거지구먼’이라고 말하더군요. 이 때 ‘내가 깨끗하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구나’라는 큰 자각을 했죠.”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성회장은 새삼스레 ‘깨끗함’을 기업경영의 제1원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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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질시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여전히 금융기관의 벽은 높았다. 그는 가장 힘든 게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방의 자그마한 건설회사이다 보니 대출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은행 지점장을 만나기 위해 3∼4시간 기다리는 게 다반사였다. 새벽 6시에 출근하는 지점장을 만나기 위해 집 앞에서 5시부터 기다린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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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LNG 분야는 국내 10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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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장은 최근 경남기업 인수를 계기로 해외 진출을 적극 타진하고 있다. 경남기업 인수는 단순히 사세 확장이라는 차원을 넘어 인생의 후배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준다는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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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의 해외 수주는 속빈 강정이 허다합니다. 저가 입찰로 수익성이 엉망이거든요. 대그룹 계열 건설사들이야 건설업 외 다른 분야를 고려해 저가 입찰할 수 있지만 중견 건설회사들은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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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가 눈을 돌린 분야는 가스·전기·환경 등 사회간접투자 부문. 대상 국가는 우리보다 개발이 덜 된 중국·베트남·인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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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나 베트남에 가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건설 인프라도 뒤떨어져 있어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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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들 나라는 전기·가스·환경 등의 플랜트 분야가 일종의 정책 사업에 가깝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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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건설은 아파트 사업보다는 플랜트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 회사입니다. 발전소와 LNG 분야에선 국내 10위 안에 드는 기업이죠. 기술력은 자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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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해외시장에서의 인지도였다. 해외 공사 실적이 많은 경남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인지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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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시장을 개척해 놓으면 후배들이 비전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해외 시장 진출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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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기업 인수 이전에도 그는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의 채소·과일 경매법인 중앙청과와 온양관광호텔을 인수한 바 있다. 인수를 했든 아니면 직접 설립을 한 회사든 대아그룹의 계열사 중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 적자 기업을 수익성 있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비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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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인수한 후 곧바로 주인 행세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단 피인수 회사 직원들로부터 신뢰감을 얻어야 합니다. 저는 ‘이 분야는 저보다 여러분이 전문가들이니 저에게 많이 가르쳐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의심을 갖던 직원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고 하나하나 얘기해 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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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인수·합병 계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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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으로도 수익성 있는 기업이라면 인수나 투자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미래 비전이 있는 업종이면 다각화할 계획입니다. 그래야 회사가 정체되지 않고 직원들도 꿈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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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푼에서 시작한 성회장은 누구보다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좋은 기업을 만드는 것과 사회환원이 인생의 양대 좌표다.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난 90년 성회장은 31억원을 출자해 서산장학재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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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12돌을 맞은 이 재단의 기금은 순수장학재단으로는 국내 최초로 1백억원을 달성했다. 그는 2010년까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을 모두 처분해 공공법인에 기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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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난 99년 곧바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은 뒤 동의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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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두 아들에게 국민주택 규모의 아파트 1채씩은 사주겠지만 재산은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제 뜻에 공감해 주더군요. 고마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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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명의로 땅이나 부동산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주식만 갖고 있을 뿐이다. 주식을 내놓는다는 것은 전 재산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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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회환원에 이토록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어려운 사람 도와줘라’는 유언을 남기셨거든요. 어차피 맨손으로 시작해 번 돈이니 사회에 돌려주고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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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돈을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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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부자였거든요. 아버님이 가산을 다 탕진하셨죠. 재산을 물려주는 게 후손의 행복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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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문화는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하는 지표라는 게 성회장의 생각이다. 미국이나 유럽이 우리나라보다 발전한 원동력 중 하나가 기부문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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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가진 자들이 기부를 많이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상속보다는 국민운동의 개념에서 기부문화를 바라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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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사족 하나. 인터뷰가 있던 날은 폭우로 교통체증이 심했다. 오후 4시30분에 인터뷰가 끝나자 차가 밀린다는 말을 들은 성회장은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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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가면 약속시간 못 지킬 것 같은데, 전철 타고 가지.” 매출 1조원대의 중견 그룹 오너가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전철을 이용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공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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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회장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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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충남 서산 生 91년 LA퍼시픽 웨스턴 대학 卒 96년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 卒 99년 목원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82년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 84년 한국 JC 국민정신운동 본부장 85년 대한유도회 충남지회장 85년∼現 대아건설 대표이사 회장 91년∼現 재단법인 서산장학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