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tion Downfall

1. 개요
2. 몰락 작전
동원되는 총 병력은 육해공 총합 1,074,600명 정도이다. 오버로드 작전 이상의 규모. 미국판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상륙전&해상원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생각하면 지상전이었던 바그라티온 작전과는 스케일의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쉬운 예를 들면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백령도에 10,000명 상륙시키는 것보다 제주도에 100명 상륙시키고 유지시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물론 제주도가 텅 빈 섬이라고 가정하고). 상륙수송도, 상륙전도 엄청나게 어렵지만 그 후의 병력/군수유지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 자체가 천조국의 위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존의 전략 전술 따위 완전히 씹어먹고 오로지 미국만이 가능한 작전.
2.1. 올림픽 작전

큐슈 남부의 일본군 배치와 미군의 상륙 예정지.
올림픽 작전은 1945년 11월 1일에 큐슈 남부에 14개 사단 250,000명의 보병과 90,000명의 해병대, 지원을 위한 항공모함 42척을 시작으로 전함 24척, 400척 이상의 구축함이 투입될 예정이었고 수천 대의 상륙정, 그리고 약 2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작전은 큐슈 남부를 점령하는 것으로 작전이 종료되는데 그 이유는 이 작전의 포인트가 밑에 서술된 작전인 코로넷 작전에 동원될 공군의 기지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주 목표는 가고시마 만과 비행장 건설에 용이한 미야자키 평야 일대가 주 지점으로 그것을 신속히 제압하기 위해선 미야자키 해안에 미 제1군단(육군 제25/33/41보병사단)을 필두로 제11군단(제43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아메리칼 사단(Americal Div)), 그리고 일본 육군의 강한 반격이 예상되는 큐수 동부엔 최정예 제5수륙양용 군단휘하 2개 해병사단(제3/4 또는 제2/5해병사단)의 동시 상륙이 예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것은 전술한 최소 60척 이상의 항모와 30척 이상의 전함, 350척 이상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대함대였다.
올림픽 작전은 사전에 X-75일 전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요충지 핀포인트 폭격 외 여기에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사격으로 개시될 예정이었다. 이에 의한 간토(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이나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시설 파괴, 상륙지점의 일본군의 손실를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대륙에 전개한 일본 육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중국 본토 연안부나 시코쿠에서 견제 작전도 아울러 실시하게 되어있었는데 최종적으로 X-4일엔 선발대로 정예 제158연대 전투단의 타네가시마 강습상륙과 제40보병사단의 고시키지마 열도의 상륙도 함께 실행될 예정이었다. X-1일에는 항공폭격 및 주력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지상 함포사격은[1] 상륙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되어 상륙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하며 X-day 오전 6시에 맥아더 원수의 진두지휘 아래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이 개시된다는 것이었다.
상륙 후 각 부대는 X+3일까지 해안 교두보를 확보, X+5일에는 미 제 9 군단(제77/81/98보병사단)이 전략 예비대로 가고시마 만에 추가상륙해 상륙부대의 손실보충과 부대 교환을 마치며 이후 상륙군은 큐슈 약 1/3을 가르는 선을 북진 한계점으로 삼아 카와치 북부의 산맥을 방어선으로 설정해 일본 육군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한다는 2단계 작전이 계획되었다.
최종적으로 작전은 X+30일에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지연될 때는 코로넷 작전에 투입될 부대를 이쪽으로 돌리거나 원자폭탄, 독가스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고 계획했다.
2.1.1. 파스텔 작전
파스텔(Operation Pastel) 작전이라는 올림픽 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작전도 준비해뒀다. 하지만 이 작전은 총 8만(!)의 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기만작전' 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참고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D-DAY 당일 1진으로 상륙한 병력이 이보다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2.2. 코로넷 작전

간토 침공작전시 미군 상륙 예상지점과 일본군의 배치.
코로넷 작전은 1946년 3월 1일에 혼슈 지방에 720,000명의 병력과 약 3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관동 상륙 작전이다. 상륙 뒤 도쿄로 진격한다.
이 코로넷 작전에서는 상륙 예정지역에 대한 대규모 항공 공격, 함상포격이 Y-15일부터로 올림픽 작전(X-1일)보다 길게 잡혀있었는데 이것은 큐슈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일본군도 그만큼 방비를 굳힐 수 있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소해와 수상장애물 제거에 투입될 시간도 Y-4일부터로 올림픽 작전보다 길었는데 뭐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이후에도 간토 각지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더 밀도 높게 실시될 예정이었다.
작전상륙일의 명칭인 Y-day는 1946년 3월 1일로 주 상륙지점은 쿠쥬쿠리 해안과 사가미만 두 곳이었다. 쿠쥬쿠리 해안에 상륙하는 부대는 호지스 대장의 미 제1군으로 작전투입 병력은 Y-day에 미 제24군단(제7, 27보병사단)과 제3해병상륙작전군단(제1, 4해병사단)이 선봉으로, Y+5일엔 제96보병사단과 제6해병사단이, 그리고 Y+30일에는 가칭 B군단(제5, 44, 86보병사단)이 상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사가미 만에는 아이켈버거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8군이 상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Y-day에 미 제10군단(제2, 4, 31보병사단)과 미 제14군단(제6, 32보병사단)이, Y+5일에 제37, 38보병사단이, Y+10일에 미 제13군단(제13, 20기갑사단)이, Y+30일에는 가칭 D군단(제4, 8, 87보병사단)이 상륙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이 밖에 미 제8군은 예비로 제97보병사단을 편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외에도 태평양 방면 육군부대의 예비로(여기엔 전략예비대도 포함) 가칭 C군단(제28, 35보병사단, 2공수사단)과 가칭 E군단(제91, 95, 104보병사단)이 또 있었다. 하여튼 이상대로 사가미만에 상륙하는 미 제8군의 병력은 제1군보다 많았는데 이것은 제8군이 담당하는 사가미만이 코로넷 작전의 주공방면이었기 때문이다.[2]
3. 취소된 원인
결론적으로는 원폭을 맞은 일본이 예정보다 일찍 항복해서 취소된 거다.
애시당초 핵폭격과 몰락 작전은 서로 대립하는 계획이 아닌, 일본 항복을 위해 동시에 진행되는 투 트랙으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고 다른 한 쪽을 취소하고 할 수준으로 말할 단계가 아니다. 만약, 일본이 핵공격을 받았음에도 항복을 거부했다면 몰락 작전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미국이 지속적인 사상자 증가와 전비부담, 전쟁에 대한 피로 등으로 악화되는 여론 탓에 몰락 작전을 취소하고 핵공격을 감행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3]
우선, 1945년 당시 미국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미국의 병력피해와 인력소모는 당시 메이저 참전국 중 가장 적었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 인구 기준으로 미국의 인구는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 기준 약 1억 3천만 명으로, 1억 6천만 명의 소련 다음으로 2위이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병력 피해 40만 7천여 명에 민간인[4] 12,000여 명으로 합쳐서 42만여 명이다. 여기에 대일전에서 포로로 잡힌 병력을 더해야 하지만 수치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독소전쟁이라는 헬게이트덕에 민간인 포함 약 900만 명을 날린 독일, 3,000만 명을 웃도는 피해를 입은 소련과는 당연히 비교조차 불가능하고, 영국의 경우 병력피해는 39만 여명으로 미국보다 적지만 민간인 피해가 10만 명 이상이다. 그리고 영국의 병력 피해는 본국에 한정한 거고, 태평양 및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의 주축이었던 안잭(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국가들의 피해를 합치면 미국보다 많아진다. 일찌감치 항복한 이탈리아나 프랑스도 병력피해는 미국보다 적지만 본토가 전장이 되면서 생긴 민간인 피해로 총 인명피해는 미국보다 10만여 명 많다.
하나 더 살펴보자.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미국의 전투중 사망자, 즉 순수 전사자는 292,131명이다. 이중 185,924명(63.64%)이 대서양, 아프리카, 유럽전선 즉, 대 독일/이탈리아 전쟁에서 발생했다. 나머지 106,207명(36.36%)만이 대일전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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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미국은 메이저 참전국 중 인구는 두번째로 많고 인명피해는 가장 적었던 나라다. 다른 나라에 비교하면 충분히 총력전의 여력이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엔 본토가 전화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결정적 이점이 크게 작용한다.
물론 여론이 전쟁에 부정적으로 바뀌어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일전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여론이 조속한 조기종전을 원했다면 당장 1944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루즈벨트가 낙선하여야 했다. 현실은 루즈벨트의 여유있는 압승.
그리고, 실로 황당하게도 몰락 작전을 단행할 시점의 미국은 동원병력과 투입 전비를 축소시키면서 역으로 대일전에 투입할 전력은 증강시키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이 가능했다.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전이 종결되었기 때문인데, 미국이 전쟁기간 내내 태평양전보다 유럽전을 중시했음을 상기하자. 유럽전 종결로 여유있는 전력의 일부만 돌리는 것으로도 미국은 몰락 작전을 위한 대대적 전력 증강 + 국내 여론을 달래기 위한 동원병력 축소를 병행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몰락 작전을 준비하는 군 지휘부의 핵병기에 대한 인식. 미국의 태평양 전쟁의 지휘부는 핵병기의 존재조차 몰랐다. 이는 워싱턴 D.C의 행정부 및 군 최고지도부도 비슷해서 최고위급 몇 명 및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자 일부만이 핵병기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 핵병기 사용을 승인한 트루먼도 부통령 시절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행정부의 No.2이자 대통령 승계서열 1위인 부통령조차 핵병기의 존재 사실을 몰랐던 것. [5]
행정부만이 아니다. 당장 대일전을 담당하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체스터 니미츠조차 전쟁 막바지에서나 핵에 대해 통보받았고, 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폭격을 전담하던 커티스 르메이는 대체 왜 최고사령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등을 폭격하지 못하게 막고 있냐!며 강력히 항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핵병기의 존재를 모르는 전선의 지휘부는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최종단계인 일본 본토 침공을 준비했고, 핵의 존재를 알고 있는 최고지도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당장 몰락 작전이 구체화되기 시작한건 오키나와 전투 직후인 1945년 6월경인데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는 7월 16일에 시행되었다. 그 전에는 핵병기의 성공 여부조차 불확실했고, 트리니티의 성공 이후에는, 핵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최고지도부 입장에선 핵을 쓰건 안쓰건 일본 본토 침공을 준비해야 했다.[6]
결국 원자폭탄 투하와 만주 작전[7]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일본은 항복해버린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미국 정부는 일본 항복시 일본 점령 계획인 블랙 리스트 작전을 실행하여 일본을 점령한다.
4.1. 미군의 예상 피해 규모
미군은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를 기초로 일본 본토 상륙 작전시 전사자만 10만 명 이상으로 나올 것이 확실할 거라 예상하였다.
작전 규모가 규모인 만큼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미군의 전사자도 적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예상 피해 정도에는 다소의 이견이 있다. 약간 더 설명하자면...
미군은 "그렇게 죽겠다고 저항한다면 가스 뿌려!" 라고 결정, 실제로 엄청난 양의 독가스를 일본 본토에 뿌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8] 실제로 미군은 대전 중반부터 화학 폭탄, 화학 포탄은 물론 각 보병 연대에까지 화학중대를 편성하여 언제든 4.2인치 박격포로 화학탄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화학전 준비를 철저하게 해놓고 있었다. 한 마디로 '쪽바리 니네들 화학탄 쓰기만 해봐라' 고 벼르고 있던 꼴.
충분한 화학전 능력이 있고 이오지마/오키나와를 거치며 최전선과 워싱턴으로부터 화학무기 사용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음에도 미군이 화학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현명하게도(...) 화학탄을 쓰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지독한 화학무기 반대론자였기 때문이다. 회의석상에서 군인들은 아예 화학탄(Chemical Bomb)의 C자도 꺼내지 못 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러나 그는 4월에 죽었고 후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의 피를 줄일 수만 있다면 화학탄 따위(?)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다.[9] 언제든 화학탄 도배가 가능했다는 얘기.
참조 - 펠렐리우 전투에서의 화학전,
참조 -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화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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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미군이 화학탄을 아무데나 막 뿌리려고 할 정도로 정신 나간 집단도 아니었다. 미군의 독가스 최우선 사용대상은 다름아닌 비행장이었다.[10] 그나마 제일 명중률이 높은 카미카제 어택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모든 비행장을 가스로 도배할 생각이었다고. 일본군의 항공전 능력은 사실상 제로가 되는 셈이다. 화학전 능력이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진 지금도 비행장에 화학탄이 한두 발 떨어지면 작전 재개까지 복구/제독에 하루 이상이 걸린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화학전 대비 수준이 어떠했는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애초에 일본군이 정상 수준일 때도 겨우 1차대전 수준의 화학전 능력을 가진 데다 전쟁 말기엔 그나마 이것도 물자 부족 등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이러한 독가스 살포 뿐 아니라 거기에 약물 살포로 논밭을 초토화시킨다는 계획도 세웠으며 원자폭탄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하기 전에는 올림픽 작전시에 해안에방어군 제거용으로 투하할 생각도 했다. 그곳에 상륙하는 미군은 생각 안하냐[11]
오키나와 상륙작전 종료 후 미국은 본토 상륙전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원자폭탄의 양산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월 1~2기 정도의 원폭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개시하게 되면 교두보에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 시기는 1945년 10~11월 정도로 예상되었으며 여기에 맞춰서 모든 작전 준비가 진행되게 되었다.
미군의 예상피해 척도가 되는 펠렐리우/이오지마/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전략/전술적 차이도 크다. 미군이 큰 피해를 본 이오지마, 오키나와는 '섬' 이다. 섬은 공격자가 전략적으로 우회할 곳이 없으며 일본군은 그 섬들의 크기에 비해 대규모의 병력과 중화기를 꽉꽉 채워넣고 요새화시킨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군이 그 섬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방어거점을 피하지도 못하고 섬의 구석구석까지 뒤지며 섬멸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피해가 그렇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본토는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산세가 험하기는 하나 일본 본토는 앞선 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고 따라서 전략적으로 우회할 길목이 얼마든지 있는 전장이다. 다시 말해 독일군이 히트쳤던 그 전격전이 가능한 전장이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여러 길목에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고[12]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하게 된다. 실제로 우회할 공간이 전혀 없거나 없다시피 하고 크기 대비 주둔 병력이 엄청 많아 미군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 비해 기동공간이 있고 크기 또한 이 두 섬보다는 훨씬 컸던 필리핀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사자 비율 1대 39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이건 필리핀 주둔 일본군이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사실상 차단된 상태에서 장기전을 해야 했다는 점을 참작해야 하긴 하지만 이 점은 이오지마나 오키나와도 크게 다를 건 없다. 당시 해안 지역이나 제대로 개발되고 크기도 일본 본토보다 작고 지세가 험준한 필리핀에서 이랬을진대 필리핀보다는 훨씬 개발되고 우회할 길목이 많고 무엇보다 영토가 큰 일본 본토에서야...
무엇보다 지상전의 꽃인 전차 전력을 보게 된다면 일본 쪽이 지나칠 정도로 참담해진다. 셔먼조차 제대로 상대할 만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던 일본군이 티거 잡자고 작정하고 찍어낸 1000여 대의 M26 퍼싱을 상대할 만한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13] 공간의 제약이 있었던 섬과는 달리 일본의 넓디넓은 본토에 미국이 얼마나 많은 중전차 사단들을 풀어놓고 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미군의 피해는 현재의 예상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일본군의 장비로는 도저히 격파할 수 없는 수십 톤짜리 쇳덩어리가 수만 대 굴러다니는데 일본 국민이 1억 명이라 한들 그걸 대체 어떻게 막겠는가.
그리고 익히 알려져 있듯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는 질과 양 모두 절망적인 수준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한때 일본군의 최정예로 쳐주던 관동군도 이 시점에서는 잡병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더 퍼시픽 8화에서 존 바실론이 괜히 일본군 병력을 칭찬(?)한 게 아니다. 그동안 남태평양과 이오지마, 오키나와에 투입된 일본군 병력은 대부분이 오랜 훈련과 중국 등지에서 경험을 쌓은 고참병이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정도나마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쓸 만한 병력과 장비는 거의 대부분이 중국 본토에서의 광대하고 지리한 소모전에 발목이 잡혀 있었으며 제공권/제해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본토 방어를 위해 재배치시키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일본 본토가 이오지마/오키나와의 100배니까 미군의 피해도 100배라는 말은 그래서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의 전사자를 10만 이상을 잡는 예상도 있는 반면 몇 만 이하의 소규모로 잡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이와 같은 이유들을 근거로 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으니 미군의 실제 피해는 작전을 진짜로 실행해보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상보다 피해가 훨씬 클 가능성도, 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미군의 피해가 어찌되든, 일본어는 저승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4.2. 일본군/민간인의 예상 피해 규모
본토 상륙전에 대비해 세운 결호작전은 일본령을 작전 지역으로 '귀축영미' 를 본토에서 아작내기 위한 방어전을 준비했다. 그래서 결호작전을 두고 '1억 총옥쇄(당시 일본 국민으로 취급되었던 내지 인구+반도 인구)' 라고도 한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군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든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은 상상을 초월한 피해를 입는 결과가 닥쳤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준비한 연합군에 비해 일본의 본토결전 전략은 카미카제를 비롯한 자살공격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나마 카미카제는 그 전술적 실효성도 굉장히 낮다. 카미카제 항목 참조. 그리고 앞서 말했듯 카미카제의 핵심이 되는 비행장이 독가스로 무력화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P-51 머스탱, F6F 헬캣, F7F 타이거캣, F8F 베어캣[14], F4U 콜세어, P-80 슈팅스타 등 온갖 미군 전투기와 지원기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을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물론 그 와중에 B-29의 폭격이 끊어졌을 가능성은 전무하니 카미카제 기체들은 독가스에서 살아남아도 그것을 몰고 다닐 조종사는 타지도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지상전으로 가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치하를 비롯한 일본의 전차는 미군의 전차와 비교하면 먼지만도 못하니 차라리 없는 셈으로 치는 게 낫고 일본 본토에 쳐들어와서 굴러다니는 미군의 중전차들을 상대할 수단은 기껏해야 대전차 백병전 민간인에게 폭약 들고 달려들게 하는 정도인데 이런 전술은 이미 미군이 운용하는 수준의 전차에게는 더 이상 약빨이 먹히지 않았다. 기갑전력이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갖춰져 있는 군대와 기갑전력은 커녕 소화기조차 제대로 못 갖춘 군대가 맞붙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매우 뻔한 일이다. 물론 IED[15]로 미군을 죽일 수도 있겠으나 이미 일본군 상대로만 10만 명이 죽어나간 2차대전 같은 대전쟁 상황에서 미군이 천단위 전사자 추가로 낸다고 눈 하나 깜박할 리 없다.
앞서 설명하였다시피 이미 정예병력도, 장비도, 물자도 고갈된 상황이라 기껏해야 민간인에게 죽창 쥐어주고 셔먼에 대항하게 하는 수준이었다. 부녀자까지 죽창 들고 훈련하고 있는 상황이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한편 일본 육군 강경파 미치광이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능력도 없고 용기도 없는 빈쭉정이 허풍선이들 뿐이다. 그나마 전후 전범으로 처형당한 소수를 빼면 그동안의 패전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은 겁쟁이들인데 무슨.[16] 실제로 본토결전이 감행되었을 경우 위에서부터,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줄줄히 항복하며 지휘체계가 붕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막장 헬게이트였다. 쓸 만한 병력도, 쓸 만한 장비도 없고 소위 '천황 폐하의 정강' 인 군인은 먹을 것을 찾아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고 군기를 잡고 치안을 유지해야 할 헌병대마저 '물욕과 색욕에 기반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으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정신력, 정신력 하지만 멘탈이 이미 붕괴한 상황이었다. 세기말적 상황이었던 1945년 4월의 베를린도 영토는 많이 잃었지만 각지에서 야전군이 수백만 단위로 남아 있었던 것을 피해를 줄이겠다고 항복한 거라 이때의 일본과 비교하면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남은 미치광이 일본 육군 강경파들이 강화를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천황 폐하의 정강된 일본 육군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싸울래야 싸울 사람도, 방법도 없었던 것.
5.1. 일본의 경우


미군의 압도적인 핵/화학전과 재래식 포격/폭격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앞서 말했듯 일본의 식량 상황은 정말로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기아 작전만으로도 45년 8월 이전에도 이미 충분히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반 년 이상 시간을 더 끌고 본격적인 본토전이 시작되었다면...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아사(餓死)가 발생하여 핵이나 화학탄보다도 일본인들을 훨씬 많이 죽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일본군이 쉽게 무너짐으로써 조기 점령되어 의외로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문제는 일본이 패배한 이후의 전후처리인데, 미국은 이미 전쟁에 막대한 병력과 자본을 쏟아부은 상황에서 소련에게 동북아전선에 참전할 것을 조르고 있었고, 종전 이후의 점령지 관리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영국, 소련, 중국에 제시한 것이 위와 같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분할통치안. 한마디로 땅은 떼어줄테니까 전쟁 좀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처칠은 전쟁 이후 냉전의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견하고 미국의 이 분할통치 계획에 반대. 일본은 미국이 통치하며 소련 견제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미국을 설득했다. 또한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인한 정책변화, 핵무기의 등장, 그리고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몰락작전은 실행되지 않고, 결국 이 분할통치안도 없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분단되지 않은 것은 미국이 핵을 떨궈준 덕분이기도 한 셈.
하지만 영국의 처칠은 전쟁 이후 냉전의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견하고 미국의 이 분할통치 계획에 반대. 일본은 미국이 통치하며 소련 견제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미국을 설득했다. 또한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인한 정책변화, 핵무기의 등장, 그리고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몰락작전은 실행되지 않고, 결국 이 분할통치안도 없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분단되지 않은 것은 미국이 핵을 떨궈준 덕분이기도 한 셈.
5.2. 한국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로 독립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몰락 작전으로 인해서 미국은 피로가 누적되어 한반도 정세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국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들이 해방 이후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주의 국가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의 북한과는 다르게 냉전 당시 소련이나 쿠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베트남, 라오스, 동독처럼 공산당 독재정권이긴 해도 상호견제적이며 분권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현재의 북한 정치가 김씨 1인 독재로 막장화가 된 건 남북 분단으로 인한 독자정부 수립과 김일성이 독자정권 수립 이후 무리하게 일으킨 한국전쟁의 영향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 정부의 법통을 이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자유시 참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등으로 김구 등 임시정부의 핵심인사들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과 소련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망명 정부로 떠돌 가능성이 있다. 다만, 실제 역사의 좌우합작운동과 같이 일부 인사가 개인 자격으로 가칭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할 가능성은 있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지상에서 견제하기 위해서 한반도 분단을 고집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단, 가능성은 높지 않다. 38선을 그을 당시에도 미국이 그걸 유지할 능력은 없었지만 소련이 전후 미국과의 마찰을 고려하여 양보한 쪽에 가까운데 일본과의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미국의 입장을 소련이 고려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모른다. 몰락 작전 자체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에도 일본 제국이 항복하지 않았을 때나 벌어질 수 있는 이벤트이기 때문. 이런 미친 위력의 폭탄을 보고 난 다음에, 몰락 작전 도중 일본 본토에 몇 방씩 원자탄을 떨구고 난 다음에 미국이 소련에게 한국의 분할통치를 요구했을 때 스탈린이 "한반도는 이제 제껍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라고 배짱을 튕길 수 있을지는 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 작전이 시행되었다면, 결과적으로는 소련군도 열심히 싸워줘야 하므로 소련도 엄청나게 지친 상황인 건 마찬가지다. 일단 독소전쟁에서 무려 2900만이 죽은 이후이기도 하다.
다만 몰락작전까지 갈 정도로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 되었다면 소련의 활약도 늘어났을것이고(홋카이도 점령까지는 충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그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대일전에 참전한건 사실이므로 미국 입장에서도 뭐라고 하기가 힘들것이다. 설령 미국의 미친 무력시위를 봤다 하더라도 그걸로 소련이 쫄아서 한반도 분할통치나 홋카이도 양도 등 미국에게 자국의 이득을 양보할것이라는 생각은 일본이 했었던 망상(우리의 힘을 보여주면 쫄아서 협상해주겠지?)을 그대로 답습하는것에 지나지 않으며, 소련은 냉전시기 초강대국을 목표로 미국과 대립했던 나라이고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오는걸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막은 사람이다. 소련이나 스탈린이나 미국의 무력이 무섭다 하여 자국의 이득을 양보했을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반도와 홋카이도를 손에 넣었다면 향후 냉전시기 아시아 패권 장악에 매우 유리해졌을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다만, 위 시나리오는 중화민국의 전후 역할을 공기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위 시나리오대로 가정한다면 1946년 장개석의 만주공략때 마셜 개입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되면 중화민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화민국과 같은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며 오히려 일본이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중화민국의 내부사정이 좋지 않아서 승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공내전을 참조하기 바란다.
5.3. 미국의 경우
미국 입장에서도 썩 그리 좋지 않다.
예상 피해 규모는 유동적이지만 미국이 더 많은 전사자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 당연한 대가이다. 그리고 지나친 장기전은 집권당의 미국 국내 정치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아무리 영광의 승전을 거둬봐야 총선, 대선에서 깨지면 무슨 소용 거기에 재주는 뭐가 넘고 돈은 누가 챙기는 격으로 소련만 '동아시아에서의 엄청난 영향권' 이라는 선물을 챙겨갈 뿐이니 국제정치적으로도 매우 불리하다.
미국이 비상륙/봉쇄전으로도 일본을 끝장낼 수 있었다. 제공권/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지 오래되었으니 일본 주위의 전 해역을 기뢰로 봉쇄하고(Operation Starvation : 기아작전) 주요 도시는 네이팜 폭격으로 일본의 산업생산력을 고갈시키며 느긋하게 기다리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소멸' 시킬 수 있었다. 이미 일본은 식량 상황이 거의 한계에 다른 상황이기도 했다.[17]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도 더 산악지가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바닷길이 험해지면 전국 각지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연안 해운의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나라가 일본이었으며 2차대전 당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로/철도가 여기저기 뻥뻥뻥 뚫리는 건 한참 후의 일이다. 원자폭탄보다도, B-29의 융단폭격보다도 이 기아 작전이 훨씬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21폭격부대의 출격의 5.7%(1529소티)만 가지고 침몰톤수 30만톤에 파손톤수 40만톤을 내었고 세토 내해의 그나마 멀쩡한 대형 항구이던 고베라든지 오사카항의 물동량을 대폭 감소시켜 버렸다(예 : 고베항의 경우 3월달의 물동량은 32만톤 정도였는데 이 기아 작전이 이루어진 후인 7월에는 4만 4000톤으로 감소하였다고 함).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런 봉쇄전도 선택지가 되기 힘들었다. 태평양 곳곳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상자와 오랜 전쟁에 국민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고 반전여론도 점차 거세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존 바실론 등 슈퍼스타를 이용한 세일즈 국채를 이용한 미국의 재정 충당도 이미 한계였다. 그래서 정치권과 합동참모본부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 부담이 점차 증가했다. 그나마 싸움박질하기 좋아하는 군부조차 예상 사상자에 대한 분석자료를 받아들고는 큰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상륙을 하든 안하든 미국으로서는 이래저래 비용지출이 너무 컸다. 괜히 몰락 작전이 쓰고 싶지 않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던 것.
다만 이득도 없는 건 아니다. 이 경우 일본은 말 그대로 전후 청산이 아주 철저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냉전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중국과의 대치 상황에서 골칫거리로 작용하는 아베 신조의 극우화 같은 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본을 완벽히 2인자화하여 중국, 소련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역을 넘겨줘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18] 어차피 실제 역사에서도 냉전 시기의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공격이 목적이라면 몰라도 방어가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곳이었고 중국이 21세기 현재처럼 급성장하리라는 예상은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다.
5.4. 소련의 경우
몰락 작전을 실행했을 경우의 최고 수혜국.
몰락 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은 일본과의 전쟁이 매우 장기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은 일본군의 소탕을 핑계로 만주, 한반도는 물론 중국 방면으로도 진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미국의 눈치도 있고 장개석의 중화민국도 있으니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중국 본토도 스탈린의 마수로부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마당에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는 사실상 100%다.
거기에 홋카이도에까지 소련군을 구겨넣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45년 8월 일본 항복 이전에도 소련은 홋카이도를 공격할 여건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아직 관동군이 각지에 산재해 있었으며 미국 역시 몰락 작전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연합국과의 관계를 우려하던 스탈린에 의해 홋카이도 공격은 시도되지 않았다. 물론 몰락 작전이 시작되고 미국이 사상자 수에 염증을 느끼고 소련에게 본토 공격을 요청하게 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소련 입장에서도 없는 해군으로 그렇게 하긴 힘들겠지만... 어차피 그때가 되면 일본도 해군은 거의 없잖아? 그리고 수송 문제는 미국에게 손을 벌려 해결하는 수도 있다. 피를 대신 봐주기를 바라는 미국으로서는 거부하기 힘들 테니까.
소련군이 미군의 병력 규모를 보고 쫄아서 그냥 아쉬운 침만 흘리고 말 거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정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전쟁은 스타크래프트 컴까기 하고 나서 지들끼리 팀 풀고 싸우는 게 절대로 아니다. 어쨌거나 당시 소련은 '동맹국' 이었다. '히틀러가 좀 더 오래 싸워줘서 극동 지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훨씬 현실성 있다. 이런 문제는 병력 규모 등 가시적인 요소로 판단할 사안이 절대 아니다. 거기다 몰락 작전을 실행한 미군은 당연히 전력 소모와 분산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모양새만 놓고 보면 스탈린은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꼴이다. 소련의 이런 넋살 좋은 태도는 애초에 소련에 돈은 돈대로 꿔주면서 쓸데없이 손을 벌려 명분과 약점만 잡힌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책임이 크다.[19][20] 소련의 태평양 전쟁 개입의 명분도 분명히 미국이 먼저 준 것이 사실이다.[21] 대소강경론자인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훨씬 일찍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다면 애초에 소련이 극동에 끼어들 여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22] 잠깐 그럼 루스벨트가 우리나라 분단을 일으킨... 왜 이리 루즈벨트 일가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안되는 거냐
간단히 말하면 소련의 일본 본토에 상륙과는 상관없이 몰락 작전이 실행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소련이 엄청난 이득을 보는 상황이다.[23]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미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2900만의 피를 흘려서 한반도 남부까지 계속 진격하게 될 경우 피를 더 흘린다는 말도 있다. 거기다가 일단 한반도 남단까지 진격했으면 필연적으로 일본 본토 상륙에도 참가할 수밖에 없는데[24] 기본적으로 상륙작전은 공격자의 피해가 큰 작전인 데다가 일본이 진짜 정신 차리고 요새를 구축하고 방어전을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즉 소련의 입장에선 더 이상의 인구손실이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더 인구를 처박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국력은 인구이기 때문에 몰락 작전이 수렁에 빠질 경우 소련의 국력이 크게 저하되었을 가능성 역시 없진 않다.
하지만 위의 일본의 상황을 보면, 일본이 저항해서 소련에게 피를 흘리게 만든다는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을 알수 있기에[25]어찌되었던 소련이 가장 큰 이득을 본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애초에 만주 전역 종결후의 일본이 소련에게 피해를 강요할수 있다는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당시의 한반도와 홋카이도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였고, 소련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손쉽게 점령할수 있었던 지역들이었다. 관동군이 완전히 망해버린 시점에서 이들 지역에는 소총만 간신히 남아있는 알보병 소수, 심지어는 죽창든 일본인들밖에 안남아있는 상태였다.(...) 미국이 몰락 작전으로 일본 본토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소련이 이들 지역을 집어삼켰을 가능성이 컸다.
6. 여담 : 각종 매체에서의 몰락 작전
무라카미 류의 소설 5분 후의 세계 및 속편 5분 후의 세계: 휴가 바이러스는 바로 이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4개국의 점령하에 들어간 평행세계 설정이다. 저 위의 지도 그대로 일본인은 거의 전부 각국의 혼혈화 짬뽕 튀기 가 되어 우민정책 아래 노예 취급을 받으며 각국 본토인들 거주지역과 대비되는 대규모 슬럼가를 형성해 살아가고 남은 순수 일본인 26만명은 지하세계를 세우고 저항한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그 세계의 일본인들은 RPG로 장갑차를 한 명당 한 대씩 잡는 교환비를 세우는 전투종족(...)[26] 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이며 극우파맛이 깃들었다고 읽는다 전쟁소설 및 대체역사물로서도 별로 가치는 없다. 애초 그쪽으로 중점을 두고 쓴 물건도 아니고. 소설로서는 그저 평작이다.
HOI2의 시나리오로 구현되었는데 이쪽의 연합군 목표는 소련군이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의 모든 군대를 분쇄하고 일본의 빅토리 포인트[27], 즉 대만과 일본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 일본의 VP가 단 1점이라도 남아있으면 게임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다만 일본에게 엄청 유리하다. 일본의 모든 영토에 주둔병과 민병[28]이 2~3사단씩 있는 데다 소련은 수송선이 얼마 없고 그나마 상륙 가능한 포인트가 홋카이도인데 여기서 본토 공격해봤자 삿포로→센다이 도강 페널티 먹어서 안습. 연합국은 대만부터 섬 하나하나 다 찍고 올라와야 하는 데다 육군이 얼마 없다. 반면에 일본은 그냥 상륙 포인트에 이동 가능한 사단 전부 꼴아박아놓고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면 이긴다. 물론 일본이 실제로 이랬다면... 소련이 이길 경우 당연히 한반도는 적화되며[29] 연합국이 이길 경우 그냥 일본 항복, 일본이 이길 경우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려맞은 연합국이 일본인의 끈기에 감복하여 협상해준다는 충공깽스런 결말. 본토까지 탈탈 털리고 VP 1포인트만 남아도 이런다?
겁스 관련 TRPG 웹진인 피라미드에 소개된 적이 있는 겁스 무한세계의 예제 세계관 중
케츠고가 있다.[30] 이 세계관을 꾸밀 때 제안할 가능성으로는 당연히 일본 본토에 대한 여러 번의 핵 폭격. 미국이 방심한 사이에 스탈린(을 위시한 공산세력)이 한반도 전역과 홋카이도를 점령한다거나 일본의 분단, 1948년에도 공화당이 미국의 정권을 잡는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http]](http://rigvedawiki.net/r1/imgs/http.png)
코에이 사의 대전략류 게임인 '개가의 호포' 는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승전국의 점령하에 쪼개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각 점령국의 지원하에 쪼개진 일본을 통일하는 것이 목표. 여기서도 자위대 무기는 어디 안 가서 최악의 가성비를 자랑. 육해공 공통으로 어중간한 성능에 비해 쓸데없이 가격이 높다.
세가새턴판으로 1995년 발매되었던 '월드 어드밴스드 대전략-강철의 전풍'에 코로넷 작전이 수록되어 있다. 게임판의 맵은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일본군과 미국, 소련군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일본군의 공중전 전력이 미국에 비해 좀 더 강하게 설정되어 있다. 스탠더드 모드에서는 단독 맵으로 즐길 수 있으며, 캠페인 모드에서는 미국 시나리오 분기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다. 색적모드를 On으로 할 경우 공격하는 미군이나 방어하는 일본이나 피칠갑이 되는 격렬한 맵.
- [1] 전함 하나의 화력은 현대 러시아군의 포병 사단 하나와 거의 맞먹는다. 즉 20개 포병 사단과 맞먹는단 소리. 참고로 전성기때 소련의 포병 사단이 16개였다.)
- [2] 사실 상륙작전에 적합한 곳은 쿠쥬쿠리 해안 쪽이었는데 그곳은 해안가의 면적도 넓고 근처에 여러 항만이 있어 상륙 후 교두보 확보에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간토 내륙으로 향하려면 에도가와나 아라카와 등의 하천하구가 있어 이후 진격에 꽤 어려움이 있으리라 에상되었다.
- [3] 오히려 여론에 대한 의식은 몰락 작전보다 맨해튼 프로젝트 쪽이 훨씬 강했다.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20억 달러가 넘는 거금을 투입했는데 관련 비용 투입이 모두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실전에서 핵병기를 쓰지 못한다면 의회와 여론은 당장 20억 달러 어디다 썼냐고 들고 일어설 게 뻔했다.
- [4] 주로 상선단에서 발생한 피해.
- [5] 오히려 스탈린은 영미의 수뇌부에 암약하던 간첩망 덕에 핵병기의 존재를 더 잘알고 있었다.
- [6] 실제로 핵폭격당한 이후의 최후의 어전회의에서도, 항복에 찬성한 해군 및 외교관료층과 달리 육군은 끝까지 항복에 반대했다. 육군의 항복불가론이 어느정도 형식적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그 항복불가론은 히로히토가 아니면 꺾을 수 없었다.
- [7] 비록 상당히 약체화된 병력이지만 당시 관동군의 양은 상당했다. 소련이 무섭다고 거기에 다 박아놨으니. 그리고 그 병력은 일본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군대였다. 거기에 소련은 일본에게 마지막 외교적 희망이었으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다 깨부순 게 8월의 폭풍 작전이다.
- [8] 화학무기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1925년의 제네바 화학전 금지협정에는 일본과 프랑스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나라에 대한 화학전 자체는 국제법상 불법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캐무시당하긴 했어도 성문화된 첫 전시국제법인 헤이그 육전조약에서 이미 질식성 화학무기의 군사적 이용이 금지돼 있었고 헤이그 육전조약은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렇고 현대까지도 전시 국제법의 기본으로서 존중되고 있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대일 화학전은 국제법 위반이었다. 현실적으론 위법이 아니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쪽에 가까웠다.
- [9] 다만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중국에 핵공격을 주장했을 때 트루먼은 그를 해임했다. 이건 핵무기에 대한 반감(애초에 원폭투하를 명령한 게 트루먼이다)이라기 보다는 명령을 무시하고 확전하려는 맥아더의 폭주를 멈추기 위한 수단이었다.
- [10] 그것은 지금의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군이 괜히 3군 중에서 화학전 훈련을 제일 빡세게 하는 게 아니다. 비행장을 무력화시킬 만한 수단으로 화학탄만한 게 없다는 걸 우리 군도 북한군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 [11] 당시 미군 지휘부는 원자폭탄의 방사능 위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방사능 피해가 있어봤자 X-레이 몇 번 찍는 수준의, 엄청나게 강력한 슈퍼폭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계획이다. 미군이 방사능 피해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되는건 전후의 여러 핵실험 및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해 사례를 종합하면서부터이다.
- [12] 군사학에서는 이를 공격자의 이점이라고 한다.
- [13] 심지어 미군은 대일전에 진정한 중전차 T29를 벙커 및 거점 파괴용으로 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 [14] 타이거캣과 베어캣은 참전을 위해 항공모함에 실리기는 했으나 전쟁이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실제로 참전하지는 못했다.
- [15] 보통 이라크 전쟁으로 유명하지만 IED 자체는 폭발물이라는 게 만들어진 시점부터 있었다.
- [16] 실제로도 항복 선언 후 사무라이처럼 할복 자살까지 한 군인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다. 목소리를 높인 건 그냥 체면치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 [17] 반딧불의 묘에서도 처절하게 묘사된다.
- [18] 사실 미군 역시 한반도에 상륙작전을 벌이거나(조선에서 일본으로 오는 지원을 막기 위한 것임을 들이대면 명분이야 충분하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에서 써먹었던 원폭을 가지고 소련을 위협하면(소련은 핵무기가 없으니까) 남쪽은 차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소련도 미국의 원자폭탄을 보고 열심히 연구해서 빠른시간내에 핵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몰락작전으로 미국이 일본에 묶여있는 기간을 생각한다면 미국측에서 핵우위를 가지고 소련을 위협할만한 시간이 거의 없다는게 문제이다. 게다가 애치슨 라인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이 한반도의 중요성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 [19] 대표적인 대소 유화론자이기도 했다.
- [20] 하지만 루스벨트의 정관(政觀)만 탓할 게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본군이
좀비처럼저항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누적되는 막대한 인명손실에 대한 부담이 루스벨트로 하여금 소련의 개입을 바라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소련도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소련 인민은 미국 대통령 선거권이 없다. 루스벨트로서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자명했을 것이다. - [21]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미국 내부의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전해왔고..."(위키백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22] 앞서 표현된 '100만 대군을 보고 쫄아서' 는 개입할 명분을 주지 않았을 때나 소용 있는 말이다. 스탈린은 '흥분한 100만 대군' 앞에서 말없이 밥숟가락 얹을 정도로 멍청한 자도, 용감한 자도 아니다.
- [23] 그래서인지 밑에서 서술할 HOI의 전투 시나리오에서도 소련이 남하하는 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한다라고 쓰여있다.
- [24] 그렇지 않으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꼴이 되므로.
- [25] 실제로 만주 전역에서 소련은 매우 적은 손실로 70만의 관동군을 제압하였다.
- [26] 고대 기독교 카타콤의 현대판스러운 거대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숨어들어 살고 있으며 그런 주제에 기술력도 킹왕짱이라 저항세력이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등 정신 나간 묘사가 일품이다. 한마디로 일본판 국뽕(...)
- [27]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서 일본은 물론 45년 당시 일본이 붙잡고 있던 마지막 영토까지도 전부 빅토리 포인트로 지정되어 있다.
- [28] 영구적으로 이동 불가 설정이 되어있는 방어용 민병이며 주둔병에게 주는 하리츠케 사단의 이름이 붙어있다.
- [29] 시작부터 북한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해있다.
- [30] 결호작전에서 이름을 따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