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가 파 헤친 조선왕릉의 비밀> 중에서
영능,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 능에 모셔진 세종대왕이 광화문 앞쪽에 떡하니 자리잡아 앉아계시고 그 앞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긴칼차고 광화문 사거리 쪽에 서있게 된 이유가 있다.
세종대왕릉 또는 영릉으로 불리는 이 왕릉은 62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왕능으로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다. 위치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위치한다.
본래 세종은 1445년 현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 즉 아버지 태종의 헌릉 서쪽에 미리 쌍실의 능을 잡게했다. 1446년(세종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 헌릉에 미리 만들어 둔 능묘에 광을 팠으나 수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곳에 모실 것을 권유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거절하고 그냥 매장을 하였고 나중에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여 왕손의 장자들이 죽는다는 풍설때문에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비로서 1469년(예종1)에 이곳 여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장당시 세종과 소헌왕후는 물구덩이 속에서 수의조차 썩지않은 상태로 있었다가 이장되었다.
세종대왕능의 성역화 사업은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 혈서충성 제국장교 출신 박정희가 제일 존경한다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하고 자신의 상대적 약점을 보완하려 했던 것인데...
무장(武將)만 성역화하는 것이 모양새가 안 좋다는 이유로 구색맞추기로 문(文)의 대표인 세종대왕이 선택되어지고 성역화하면서 조선왕조 능 중에 가장 성역화가 잘된 곳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순신보다 등계가 상위자인 임금 세종은 광화문 쪽에 떡하니 자리잡아 앉아계시고 그 앞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긴칼차고 위풍당당하게 광화문 사거리 쪽에 서있게 된 이유이다.